퀘렌시아 46

석양(夕陽)

석양(夕陽) 억울한 건 아닌데 석양빛에서 눈을 돌릴 수 없네. 바닷가 물 뒤 어둠이 걸려 있는데 부서지는 하얀 포말이 밀려오네. 그리워하며 밀려오는 포말은 인생 저기에서 밀려오는가 나뭇가지 흔들리는 시간에서 밀려오는가 억울한 건 아닌데 풀잎이 끝도 없이 흔들리네. 저기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인가 석양빛 어스름에 흔들리는 것인가 흔들리는 그 끝이 보이지 않네. 인생 저리로 가서 흔들리네 인생이 병신인가 병신이 인생인가 바닷가 물소리는 그늘 속에서 첨벙거리는데 내 다리는 어디에 있나, 저리로 간 것은 저리로 간 것이고 어디에 있는 발자국인가, 시간만 남아 있네.

퀘렌시아 2021.10.13

양재역에서

양재역에서 양재 시민의 숲은 있는데, 양재 시민의 숲에 갈 차비가 없다. 양재 시민의 숲에 갈 차비는 있는데, 양재 시민의 숲에 가서 할 일이 없고, 반겨줄 사람도 없다. 내가 가진 것은 지하철의 빈 의자뿐 이 지겨운 빈 의자에서 일어나도 갈 곳이 없다. 지하철에 지하철은 또 달려오고 알림음은 울리지만, 반겨줄 그 누구도, 기억에 남은 시간들은 깨어진 햇빛처럼 길바닥에 흐르는 물을 비추지만, 그 물 위에 내 얼굴을 비추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처럼 흐르는 시간들이여 누가 왔다가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시간이여 철길에 몸을 내던지듯 내던지고 싶은 시간이여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 어쩔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위에 세월이 흘러가는 것인가? 바람이 불어가는 것인가 누구를 원망..

퀘렌시아 2021.10.13

눈의 무게

눈의 무게 눈의 무게는, 겨울 저녁을 스치는 바람이다 찬바람이 지나가는 집들의 불빛과 담 사이를 지나는 시간이며 눈이 내려 얼어버린 골목길 위에 눈 위로 불어가는 바람 위에, 얼어버린 눈길 위에, 먼 눈길같은 길에 있다. 저녁을 지나가는 찬바람은 불빛과 어둠을 넘나들며 너울거리는데 지나보면 어두운 그때 한때였는데, 왜 길이 멀었던 걸까 눈의 무게 위에, 어스름은 흔들리고 저녁은 추위 속에 파묻혀, 저 가벼운 눈의 무게 위에, 저 가벼운 눈의 무게 위에, 하얀 꿈 위에 가벼움도 흘러간다. 어쩔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흘러간다. 저 가벼운 눈의 무게 위에 , 경계없는 저녁 나뭇가지가 흔들리는데 아 눈의 하이얀 무게여, 흘러가는 눈이여, 하이얀 눈의 무게 위에, 추위에 떨고 있는 것들이여, 가늠없는 어둠은 ..

퀘렌시아 2021.05.31

망각은 없다

망각은 없다 나더러 어디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 라고 말 할 밖 에. 돌들로 어두워진 땅이라든가 살아 있느라고 망가진 강에 대해 말 할 밖 에; 나는 다만 새들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알고, 우리 뒤에 멀리 있는 바다에 대해, 또는 울고 있는 내 누이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장소들이, 어찌하여 어떤 날이 다른 날에 이어지는 것일까? 어찌하여 검은 밤이 입 속에 모이는 것일까? 어찌하여 죽은 사람들이? 나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물는다면 나는 망가진 것들 얘기부터 할 밖에, 참 쓰라림도 많은 가구들, 흔히 썩어버린 큰 가축들, 그리고 내 괴로운 마음 얘기부터, 서로 엇갈린게 기억이 아니다 망각 속에 잠든 노란 비둘기도, 눈물 젖은 얼굴들, 목에 댄 손가락들..

퀘렌시아 2021.01.01

아름다움이 머무는 곳/ 파블로 네루다.

아름다움이 머무는 곳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맨 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의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 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 푸른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하는 것은 산더미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

퀘렌시아 2021.01.01

버리지는 않았으리

버리지는 않았으리. 목숨과 바꾸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면 바다의 파도는 저렇게 하얗게 부서지지 않았을걸. 목숨과 바꾸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면 기다려도 밀려오지 않는 저 파도가 허망하게 부서지지는 않았으리. 죽음과 바꾸고 싶은 시(詩)가 있다면 장미꽃이 저렇게 아름답게 피지는 않았으리 죽음과 바꾸고 싶은 시가 있었다면, 계절을 지나가는 바람이 장미앞에서 저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으리 장미 앞에서 바람이 흔들리는 건,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가 있을 때부터, 기다림이 패배로 끝났을때부터, 기다림의 문이 잊혀졌을때도, 장미꽃이 죽음처럼 아름다울 때도, 목숨과 바꾸고 싶은 시간이 있었다면 기다려도 지워져도 밀려오지 않는 파도와 바다에서 버릴 것 없는 인생을 버리지는 않았으리. 거리의 노숙자가 연주..

퀘렌시아 2020.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