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불빛이 들지 않는 골목길을 걸어가는 것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결이 전봇대 형광등 불빛과 어둠을 흔들고 있는 그 길이 질척이는 길이었어도, 오늘 그 길로 가는 것은 가고 싶지 않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가고 싶지 않은 집이라도 발걸음이 거기로 향하는 건 아무데도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 곳으로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으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바람결에 흩어지는 불빛들 사이로
어둠 뒤로
어둠은 절정인것 같지만
절정을 향하는 것 같지만
절정을 향하여 떨어지지만
절정이 아니듯이
절정에서 비켜난 어둠이듯이
어둠을 향하여 빗방울은 떨어지지만
빗방울은 세월의 끝에서 낡아가는 처마에, 처마끝에, 처마끝 녹슨 양철조각 위에
기억 위에
잃어버린 기억 위에
바람에 대고 내걸던 세월들에
그대에게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대에게
떨어진다.
가고 싶지 않은 집이라도 거기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운명이기 때문일까,
누가 준 것인지 알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일까,
기억은, 그 불빛을 서늘함을 거부하는 기억은
세월 속에 망각으로 덮혀있다.
한조각의 쓰레기에 덮혀있을지 모르는 기억들,
그 기억이라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 운명이라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살아가기 때문일까
살아있기 때문일까
살고 싶기 때문일까
계절의 뒤편에 있는 것들은 존재의 주소가 있을까
흩날린다는 것과 흩어진다는 것은 망각에 덮혀 있을까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을까
한 존재가 휩쓸리는 세월의 끝에서 낡아간다는 것은
세월의 끝에서 먼지처럼 묻혀져간다는 것은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운명처럼
가정법도 아닌
비극처럼
비극의 비유처럼
비가 어둠 속에 떨어진다.
땅에, 어둠의 大地 위에 떨어져
부서질 줄 알면서도
부서지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방식인지
순간이 순간 때문인지
그 순간 취했었는지
앞도 뒤도 없이
지체없이
추락에 취했는지
비바람에 섞여 찢어지는 민들레처럼
세월에 대고
비가 떨어진다
세월보고 들어보라고 떨어지는 것인지, 원통하게 흩날리는 것인지
비가 어둠 속에 떨어진다.
너를 위하여 떨어지는 것도 아닌, 그 무엇도 위하지 않는
비가,
어둠 속에 떨어진다
인생에는 거리(距離)가 없다는 듯이
어둠에도 거리가 없다는 듯이
大地에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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