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꽃
나무 아래 안개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 속에 안개꽃이 있는 것인지,
안개꽃이 흔들리는 것이 바람인지,
안개꽃이 눈 앞에서 흔들리는데
이유도 모른채 끊긴, 그대의 연락이 검게 멀다.
세상 살아가는 일이 안개꽃 흔들리는 것만큼이나 바람을 타는 것이기도 한데,
아무 이유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것 위에서도 흔들리는 것이기도 한데
그대가 세상 저쪽에 있는 것 만큼이나
내 외로움은 존재하는 이유가 될까,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존재하는 이유가 될까,
그대가 가버렸어도
내가 흔들리는 것은, 그대가 내게 아직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그대는 가버렸어도, 그대는 안개꽃 흔들리는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안개꽃 흔들리는 그 시간에, 그시간 너머서 시간의 간격 위에 그대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안개꽃이 흔들리면 그대를 그리워해도 될까,
그대 생각이 하얀 포말처럼 바람 속에 섞여오는 것은
그대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일까,
내가 내민 세상과의 약속 때문일까,
잊힌 기억이라도
잊힌 시간처럼
바람에 흔들려 오는 것은.
파도.
파도는 자기가 일으킨 하얀 포말을 자기가 덮는다.
시간이 덮어버리는지,
어느날 지나가던 시간들이 덮어버리는지
나뭇잎사귀는 푸른 하늘에 흩날리지만,
파도는 자기가 일으킨 눈물을 자기자신이 덮어버린다.
인생은 추억을 덮어버리는 것.
덮인 추억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며,
파도는 자기에게 덮쳐온 하얀 포말을 눈물로 덮는다.
덮혀진 하얀 포말을 보며,으깨어진 포말을 보며 꿈과 인생에 대하여 생각한다.
파도는 자기에게 덮쳐온 하얀 포말을 자기가 덮어버리지만,
자기에게 덮쳐온 하얀 포말을 자기가 덮어버리는 理由를 모르지만,
모래를 씹어 삼키고 있다,
모래를 씹듯이, 파도는 자기에게 덮쳐온 하얀 꿈을 자기자신이 덮어버린다.
시간은 그대에게 주던 노오란 꽃 속에 있었으나
노오란 꽃의 향기 속에 있었으나, 그 긴 시간 동안 시간만을 생각했었으나
나는 아직도 그대의 마음을 모르지만,
그대가, 검은 영화필름처럼
끊어진 理由를 모르지만, 어둡고 긴 시간의 터널 안에서,
그대의 理由를 모르지만,
그대의 마음을 모르지만,
철지난 바닷가에 오는 것은 잡풀과 얽힌 바람만은 아닌 것을,
철지난 바닷가에 오는 것은 사람만은 아님을,
파도는 자기에게 덮쳐 온 하얀 포말을 눈물로 덮는 理由를 모르지만,
부서지면서도 밀려오는 理由를 모르지만,
시간 위에 밀려오는 포말을 모르지만....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금잔디
김소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파도
오세영.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파도가 밀려온다.
울고 웃고,
웃고 울고
한나절, 갯가에
빈 배 지키며
동,
서,
남,
북,
소금밭 헤매는 갈매기같이,
지우고 쓰고,
쓰고 지우고,
萬里長書로 밀리는 파도.
바다에 오는 이유
이생진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모두 버리러 왔다
몇 점의 가구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인장과
내 나이와 이름을 버리고
나도
물처럼
떠 있고 싶어서 왔다
바다는 부자
하늘도가지고
배도 가지고
갈매기도 가지고
그래도 무엇이 부족한지
날마다 칭얼거리니
파도
정숙자
잠들지 못하는 기억 하나가
되돌아오고
되돌아가고.
바다에서 오는 버스
나태주
아침에
산 너머서 오는 버스
비린내 난다
물어보나 마나 바닷가
마을에서 오는 버스다
바다 냄새 가득 싣고 오는 버스
부푼 바다 물빛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
풍선처럼 싣고 오는 버스
저녁때
산 너머로 가는 버스
땀 냄새 난다
물어보나 마나 바닷가
마을로 가는 버스다
하루종일 장터에 나가
지친 아주머니 할머니들
두런두런 낮은 말소리 싣고
지는 해 붉은 노을 속으로
돌아가는 버스다
파도.
그대가 가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자고 가자고 억지로 끌고 온 것이 아니다.
밀려왔을 뿐이다.
덮히면서 밀려 왔을 뿐이다.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왔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꿈은 하얀 포말처럼 흩날리고 싶었으나, 언제인가 나도 모르게
내가 나를 덮으며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내가 나를 덮을 줄, 모르면서 왔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의 꿈은 하얀 포말처럼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밀리며 밀려오며
바다 위를 날아가는 새가 무엇을 보며 우는지, 울고 날아가는지
바닷물은 끊임없이 밀려오는지,
불어오는 것은 붉은 장미 꽃잎이 계절을 피고지는 그 시간이었음을,
그대에게 피어나는 것은 붉은 장미였으나,
내 마음에 피어나는 것은 피고 지는 그대, 그대의 존재였음을,
그대가 피어나고 지는 내 마음이었음을,
그대가 떠나간 것은
바람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대를 바라본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음을
그대가 가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그대를 끌고 억지로 온 것이 아니다.
바다 위를 날아가는 새는 계절을 울고 날아가지만,
내가 듣는 것은 계절의 육성(肉聲).
내가 맡는 것은 바다의 비릿한 냄새.
그대가 온 것처럼.
그대가 가자고 한 것처럼.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봄
영산홍이라도 보여줘야 할 텐데,
분홍색 영산홍이라도 보게 해야 할 텐데,
말은 입 안에서 맴 돌다 뒤꼍으로 가서, 지나간 세월처럼 주저앉고
할 말들은 없는 듯 덮여버리고
마음 없이, 세월이 가는가.
분홍꽃이 피고지고 가진 것 없는 봄이 지나가는가.
영산홍은 그대의 약속 만큼이나, 피어 있을라나
그대의 약속 만큼이나 , 봄 산 나무들은 얽혀 있을라나
영산홍이라도 보여줘야 할 텐데
영산홍. 그대가 살아오던 인생 만큼이나 영산홍은 그대 눈밑의 그늘에서 멀어,
피고지는 것이 지나가던 봄이던가 못내 얽힌 인생의 골목이던가
붉게 피어나는 한송이 꽃도 알지 못하고 지나친,
사람이 지나는 세월이 꽃한송이도 피워내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돌아서서, 꽃한송이도 피워내지 못한 세월을 보네.
지나가는 것이 세월이지만
꽃한송이도 피워내지못한 시간이
오늘, 봄이 지나가는 나무 가지에 걸려
지나가는 봄이 나뭇가지에 걸려,
구름은 비를 데리고
1.
바람은 물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새는 벌레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구름은 또 비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나는 삶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2.
달팽이는 저의 집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백조는 언 호수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어린 바닷게는 또 바다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아, 나는 나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