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렌시아

서정주 시모음

인천 주안 자동차 2019. 3. 21. 11:47



가을비 소리.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 서정주.




기다림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 굽이를 넘어간 뒤

인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小滿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승의 꿈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인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꺼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서정주





1.

하늘에 구름 흘러가듯 산다.

어쩔 수 없다.

가진 게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궁핍한 가게 살림과 장부 외엔 별 신통한 것도 없다.

1년 또 1년 너머가는 시간과 달력 사이로 바람이 빠져 나가고 있을 뿐,

햋빛은 쏟아지고, 노오란 민들레꽃은 인적 없는 밭 위에 피어 있을 뿐이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스치고

봄은 또 돌아 오고.

바람이 묻혀진 기억처럼 나뭇가지를 흔든다.


어쩔 수 없는 봄이 오고

봄 바닷물은 눈동자 위로 넘실거린다.

그리워하던 것들은 잊어버린지 오래다.

잊어버린 것들 위로,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오래되어 잊혀진 것들처럼 봄바람이 스쳐간다.

그리움이란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움이란 것은 내게서 멀리 있는 걸까,

그럴 수 있을까,








달을 쳐다보며 은은한 내 마음.

밤 열 한시 경인데 뜰에 나와

만사(萬事)를 잊고 달빛에 젖다.


우주의 신비가 보일 듯 말 듯

저 달에 인류의 족적(足跡)이 있고

우리와 그만큼 가까와진 곳,


어릴 때는 멀고 먼 것

요새는 만월(滿月)이며 더 아름다운 것

구름이 스치듯 걸려 있네.



--천상병.





    꽃




나뭇잎사귀 그늘 속에 떨어져 있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저것도 꽃일까, 하이얗게 빛나던 저 과거도 꽃일까,

과거의 날들을 노트 속의 글씨처럼 마음에 담고 있는 저 시간들도 꽃일까,

과거의 시간들도 꽃처럼 묻혀질까.

그대가 아니라면

꽃이 떨어진들 누가 그대와의 기억을 찾아가겠는가

그대가 아니라면

꽃이 떨어진들 누가 그늘 속에 떨어진 꽃을 기억하겠는가

그대가 아니라면

꽃이 떨어진들 누가 과거를 생각하겠는가

그대와의 일들이 슬픈 일이었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것이었든

그대가 아니라면

누가 그리워하겠는가

떨어진 꽃을 굳이 洛花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것은

떨어진 꽃이라도 洛花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은....

떨어진 꽃의 계절을 떠올리기 때문일까

떨어진 꽃의 과거를 떠올리기 때문일까

시간이 가버리고, 기억도 가버리면....

꽃 진 자리의 어둠도 가버리면....

떨어진 꽃이라도 저 시간 속에 꽃이고 싶었던 것은

흔들렸던 온 계절 때문에,

온 계절에 흔들렸기 때문에....

온 계절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대에게,



흔들린다는 것은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흔들린다는 것은

지금은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흔들린다는 것은

지금이기 때문이다.


흔들린다는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것은 그대이지만

그대가 흔들리는 것이지만

그대의 무게가 기울고 있는 것이지만

그대의 세계가 기우는 것이지만 숲 속의 새들이 놀라 푸른 하늘로 날라가는 것이지만

새들이 놀라 날개짓한다는 것은

그 날개짓은

무게가 기우는 것.

세상의 나뭇가지에 열매들이 사라지고 꿈들이 사라지고

흔들리는 것은 그대이지만 그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지만 나뭇가지에 흩날리는 햇빛이 어느 한

때이지만

담배연기같은 울먹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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