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렌시아

유시화 시모음

인천 주안 자동차 2019. 5. 16. 19:46


    길 가는 자의 노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유시화





     바다



버리고 싶었지만, 버릴게 없었다.

버릴 게 없는 것, 그것을 버리고 싶었었는가.


내가 갔는데,

실상 바다에 간 것은,

밀물져 오는 바다뿐이었다.

바다는 아무말도 없었으나,

물들이 내 가슴 저 멀리에 밀리고 있었다.

버릴 것도 없는데, 버리고 왔다. 

끊임없이 밀리는 바닷물은 그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였으나

출렁이는 바닷물에서인듯 내게서인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속삭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기다렸었는지, 무엇을 왜 그리워했는지

묻고 있는데, 바닷물이 밀려온다.

버리고는 싶었지만, 버릴게 없었다.

질긴 것은 목숨뿐,

아, 그리움 위에 떠도는 것은 무엇인가,

저녁불빛들이 놓아버린 골목 속에 잠들어 있다.

버리고 싶은 것은, 버리고 싶은 人生이었으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도 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묻고 있는지, 내가 내게, 묻는다.

나는 내게 묻는다.

질긴 것은 밀물에 비치는 잔가지 같은 빛들.

버릴 것도 없는데,

끊임없이 밀리는 바닷물.


내가 갔는데,

실상 바다에 간 것은,

밀물져 오는 바다뿐이었다. 






      

                                           






'퀘렌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자영업자가 바라본 가난요인  (0) 2019.10.03
기형도 시모음  (0) 2019.06.18
안개꽃. 파도. 김소월 진달래꽃.파도에 관한 시모음  (1) 2019.04.27
서정주 시모음  (0) 2019.03.21
천상병 시모음  (0) 201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