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갈 것만 남아
/최정
냉장고는 고장난지 오래
세탁기는 덜컹덜컹 자주 멈추고
텔레비전 버튼은 잘 눌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언제고 떠나려 새것 사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사실은 다행이지 않다
쓸 일 없어진 침대도
들춰본 지 오래된 책들도
하다못해 서랍에 넣어둔 각종 고지서들도
일일이 확인해 버려야 하고
느려 터진 컴퓨터를 버릴까 말까
도시를 청산하는 일에 버릴 것만 남아
숨만 쉬고 사는 데도 돈을 청구하는 도시에게
조금은 시원섭섭하고
버릴 것들마저 돈으로 계산해 주는 도시에게
차라리 감사해 하며
무엇을 더 버릴까 궁리하는 하루
내 마음에서는 무엇을 버리고 갈 것인지는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날이 저문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야 하는 깊은 산골에서
늦깎이 농부로 살아남으려면
한 줌 흙 같은 시인이 되려면
어느 귀퉁이 마음 한 칸 버리고 갈 것인지
두 칸, 세 칸 아니 다 버릴 것인지
미처 물어보지 못하고
에필로그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은 후기, 후기 끝말 그 언저리,
하지 못한 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풀이 흔들리든,
아무도 보아주는 이가 없는데 풀이 흔들리든,
아무도 보아주는 이가 없는데 풀이시들든,
외롭게 흔들리든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은 에필로그, 후기, 건물 뒤 담벼락 아래 그늘,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되었으니 후기쯤에선 항상 풀이 그렇게 흔들린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후기가 되어버렸으니, 후기에선 항상 풀이 그렇게 흔들리고, 그렇게 자라나고, 그렇게 또 죽어갈까,
시간의 경계를 달려가는 기차가 빙빙 돌아서 가다가 여기에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고 시간의 지침을 표시할 것인가.
여기에서도 정차하며 이별의 슬픈감정들이랑 사랑들을 표시할 것인가.
빗방울이 흩날리며 죽은 나무를 일깨운다.
최승자 시인의 "인생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는 싯구에 공감하며 풀이 흔들린다.
나무 둥치에 뜨거운 바람이 불어가며 나무아래 푸성귀들을 흔드는,
희망은 뜨거운 한여름에 돌아가는 선풍기에서 뱉어나오는 바람처럼 너덜거리나, 예쁘고 아름답게는 못해도, 영원의 시각에는 들지 못해도
서러울 것 없는 이 아니라, 서러움을 잊어버린.
살아가는 것이 풀잎사귀 흔들리는 것보다 가볍다고 생각될 때, 풀이 흔들린다.
나비가 푸른 하늘을 스치듯, 푸른 하늘을 펄럭이듯
그렇게 날아오르는 것이 추락임을, 그것이 마음 속에 추락임을,
그것을 마음에 새기는 세월을....
내가 살아가는 시간에서의 상식은 아니겠지, 꿈꾸는 것이 추락은 아니겠지,
내가 부정하는 것은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겠지....
산다는 것이 풀잎사귀 흔들리는 것보다 가볍다고 생각될 때
풀이 외롭게 흔들린다.
'퀘렌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지우 안도현 시모음 (0) | 2018.06.10 |
---|---|
12월 (0) | 2018.06.09 |
눈 시모음 (0) | 2018.06.08 |
나무, 잎사귀, 장미, 민들레, 신경림 갈대 (0) | 2018.06.05 |
하이네 시모음. (0) | 2018.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