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렌시아

김수영 시모음

인천 주안 자동차 2018. 5. 20. 18:36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리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봄밤' 전문







     파밭가에서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잃는 것이다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都會(도회)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小說(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生活(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잔히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餘裕(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別世界(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 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 壁畫(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運命(운명)使命(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放心(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풀로페라>보다는 팽이가 記憶(기억)이 얼고

강한 것 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數千年前(수천년전)聖人(성인)과도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설어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폭 포


                                                                    -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눈

                                     -김수영.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린다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줄 건너 두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갈대,               

.


갈대의 흔들림이 갈대의 마음인 것은 그때는 몰랐지.

갈대의 흔들림이 바람의 소리인 걸 그때는 몰랐지,

갈대의 흔들림이 뿌리째 뽑히지 않으려는 몸짓인 걸 그땐 몰랐지,

갈대의 흩날림이 뿌리째 뽑히지 않으려는 마음속 울음인 걸 알아가기 시작한 건, 내 살아가는 것이 뿌리째 흔들릴 때 였고,

갈대의 흩날림이 마음속 울음인걸 알아가기 시작한 건, 내 살아가는 것이 의미없이 흩날리기 시작할 때 였지

갈대의 흔들림이 그리움인줄 그땐 몰랐지,

- 그리움이 애터지는 눈물이었던건, 세월이 흐르고 알게 되었지
흔들리는 갈대가, 내 마음에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건 세월이 흐르고 알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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