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렌시아

숯불의 시. 김신용 시모음.

인천 주안 자동차 2018. 5. 20. 17:22



          숯불의 시.        



군불을 지피고 남은 숯불에 감자를 묻는다
숯불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는 것 같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로 몇 알의 감자라도 익힌다면
사그라져 남는 재도 따뜻하리라,고 생각하는
눈빛 같다. 수확이 끝난 빈 밭에 몇 줌의 감자를 남겨두는
경자(耕者)의 마음도 저와 같을까?
묻힌 것에게 체온 다 주고 사그라지고 있는 모습이
삶이 경전(耕田)이며 곧 경전(經典)이라고 말하는 눈빛 같기도 하다
추수가 끝난 빈 밭에서 주워온 몇 알의 감자,
숯불 속에서 익고 있는 그 뜨거운 속살이 심서(心書) 같아
마음의 빈 밭에라도 씨앗 하나 묻어둔 적 없는
내 삶의 경작지(耕作地)가 너무 황량해
한 끼의 공복을 메울, 그 묵언의 재 속에 남겨진
사유 앞에 내민 내 텅 빈 두 손이 시리다
숯불 꺼지고 나면, 또 어둠의 재 속에 묻혀버릴 이 저녁



                                /김신용.





         부빈다는 것.

 

                                        

안개가
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운 비 듣는 소리를 낸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준다
안개와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和音,
강아지가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무게가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표면장력,
나뭇잎에 물방울이 맺힐 때마다,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는
안개,
그 안개의 粒子들

부빈다는 것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들을 쉬게 하듯이



                              /김신용.





       재봉틀.



풀밭 위에 재봉틀 한 대가 놓여 있다
365일 수의를 짓느라 낡아지고 칠 벗겨진 재봉틀
순한 눈망울의 맹인 안내견처럼 풀밭에 앉아 있다
그 푸른 지팡이에 이끌려온 내 만혼晩婚의 날들
된장독 이불 보따리 같은 가재 도구들의 곁에 부려놓고
신호등 앞에서 앞발을 모으고 있는 것처럼 앉아 있다
저 신호등의 색깔이 푸른 제비꽃으로 바뀌면
또 어디로 가나? 눈 깜박이는 나비 한 마리
재봉틀 위에 날아와 앉아, 낯선 길을 눈새김 하듯 날개를 접는다

풀로 만들어진 수의
풀의 실을 뽑아 지어진 옷을
매일 하루 하루에게 입히며, 그대 위해 옷 한 벌 지어본 적 없는
품삯, 풀에서 뽑아낸 실로 지어
풀처럼 깨끗이 삭아 갈, 또 하루를 꿈꾸는지
나비가 팔랑 나래를 펴고 울타리를 넘어 날아간다
풀의
옷은, 풀잎이듯
태우면 고운 재의 입자粒子만 남는, 눈길 거두고
몸 일으킨 맹인 안내견, 목줄 내밀어 새로 이삿짐을 푼 집의 방으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이다
풀밭 위에
놓여있는 재봉틀 한 대,
황혼을 이끌고 온 해거름의 일꾼처럼, 순한 눈망울을 껌벅이며
마당 가에
앉아 있는, 내 만혼晩婚의
텃밭,
                         

            /김신용




                         아내의 재봉틀 / 김신용

 

 

 


        수의를 만들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

        토담 귀퉁이의 조그만 텃밭을 깁는다

        죽은 사람이 입는 옷, 수의를 만들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 푸성귀가 자라고

        발갛게 익은 고추들이 널린 햇빛 넓은 마당을 깁는다

        아내의 가내공장, 반지하방의 방 한 칸

        방 한 가운데, 다른 가구들은 다 밀어내고

        그 방의 주인처럼 앉아 있는 아내의 재봉틀,

        양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맨발의 빗소리 같은 경쾌함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자급자족할, 지상의 집 한 칸을 꿈꾸고 있다

        지금, 토담 안의 마당에서는 하늘의 재봉틀인 구름이

        비의 빛나는 바늘로 풀잎을 깁고,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깁고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들을 기운 자국 하나 없이 깁는 고요한 구름의 재봉틀,

        그 천의무봉의 손이듯, 아내의 구름인 재봉틀은

        지상의 마지막 옷, 수의를 지으면서도

        완강한 생활의 가위로 시간의 자투리까지 재단해

        가계(家計)의 끈질긴 성질을 깁는다






민달팽이 -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감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納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

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진달래꽃,



꿈이라면, 한바탕 봄날의 흐드러진 몸살이라면
죽었다 깨어나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시간(時間)이 멈춘 것이라면
죽었다 깨어날 때만 피어나는 봄날이라면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면
한줄기 바람으로 흘러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면
아아 내 살아가는 것이 몸살이었다면, 한줄기 인연의 끝에서 너는 무엇이었느냐
너는 내 인생(人生)을 스쳐가는 찰나였느냐? 순간이었느냐? 인연이었느냐?
계절을 지나치는 설움이었느냐 한때였느냐
꿈이라면, 한바탕 봄날의 흐드러진 몸살이라면 내가 다 놓고 가는 지나치는 한줄기 바람이라면
한줄기 바람 끝에서 얼핏 보이는 꿈이라면
내가 보는 것은 피어난 꽃날이지만
내 마음은 피고 지는 봄날이었으니
아아 꿈이라면, 한바탕 봄날의 흐드러진 몸살이었다면
     
아아 곱다.
     
그러나, 인생(人生)은 곱지 않다.
그래도 진달래꽃은 곱다. 흐드러져도 흐드러져도,
흐드러지도록 한 인생 내내 곱다.
한 인생이 저물 때 까지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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