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여름날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 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한숨을 쉬기까지 오십년,
여기까지 오는데, 오십년. 태어나서 오십년인가 골목길을 들어서서 오십년인가,
어스름 스러진 골목에서 비틀거리던 발걸음부터 오십년인가,
요만큼의 理由와 사랑과 절망을 내걸고 비틀거린 발자국,
여주나무 어둠 속에서 내뱉는 한숨까지가 오십년인가,
희망을 쉽게 말한다는 것이 거짓이란걸 알게 될때 까지 ,
쉽게 말해진 희망이 거짓이란걸 알게 되기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라, 절뚝거리며 여주나무 어둠속에 주저앉은 것이란 것을 알게 되기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라 거짓이 거짓임을 알기까지, 그때가 오십년이 아니라 단지 한 찰나의 절뚝거림이나 주저앉는 것이란 것을 알 뿐이었다는 것을,
단지 여주나무 어스름속에 주저앉기까지의 時間이었다는 것을
내가 내게, 뱉어내는 한숨이었었다는 것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궃은 금전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사랑은 남아서,
사랑은 남아서, 아침 빛 꺽어지는 그 시간에서
사라지는 것들 곁에 서서
흔들리나,
그 어려운 시간 곁에서
한숨을 쉬고 있나
사랑은 스러지는 한숨 속에서 담배 연기같은 뽀얀 휘파람을 입안으로 울먹이고 있나
사랑은 남아서, 사라지는 시간 곁에서 뽀얀 한숨을,
잎사귀에 맺혀 떨어지는 맑은 물방울 같은,
사랑은 남아서, 희미해져가는 노래를 듣고 있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나, 사랑은 남아서,
귀 기울이나
아직도, 나뭇가지에 아침 햇빛이 걸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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