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렌시아

류시화 시모음

인천 주안 자동차 2018. 5. 22. 16:16




    민들레

                                                                                                           /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Nazim Hikmet)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겨울나무

                                                                                          장석주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 있는
흠 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그건 바람이 아니야


                                                                                      류시화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불붙은 옥수수밭처럼
내 마음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입 속에 혀처럼 가두고
끝내 하지 않는 말
그건 바람이 아니야

.

내 몸속에 들어 있는 혼
가볍긴 해도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나는 바람 위에 무엇을 놓아 버렸는가,





나는  바람 위에 무엇을 놓아 버렸는가,


남아 있는 것은 미련과 후회, 고단한 행로(行路)이지만

내가 후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모과나무 가지 끝에 가늘게 흔들리는 것에도 무언가 있음을 느끼는 것은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어리석게 믿으려는 것은,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남아 있는 것은 미련과 후회뿐이지만,

수십년 시간을 건너 그대에게 내미는 손.


나는 바람 위에 무엇을 놓아 버렸는가,


흘러가는 바람길에 잎사귀 속에 길은 흩어지고 있지만,

잎사귀 속에 길은 보이지 않지만,

그늘 속으로 바람이 흘러가고 있지만,

나는 바람결 위에 무엇을 놓아버렸는가.


태양은 끊임없이 시간을 나르고, 태양의 시간 아래 풀과 작물들은 계절을 따라 피고 지지만, 엉킨 실타래처럼, 햇빛을 좇아가고 있는데,

망각(忘却)의 시간들은 대지를 낮은 강물처럼 줄지어 지나가고 있는데, 무엇이 사라져 버렸는가. 거짓말처럼 지나간 시간들, 햇빛이 비치며 오늘 또 하루의 일과는 비어있는 머릿속을 휘젓는지, 내가 나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네가 나일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시간 속에서 뒤죽박죽 되었는지, 내 속에서 시간이 뒤죽박죽 되었는지. 기차가, 거품처럼 밀려오는데,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거짓인가?

노트 위에 기록한다는 것과 , 생각한다는 것과....


수십년 시간을 건너 건네는 손.


나는, 바람 위에 무엇을 놓아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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