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연인(戀人)
낮과 밤일 수밖에 없는 인연이기에
이 세상은 서로 묶이고 묶여
서로의 마음 속에서 그리움의 이름으로
살아가기도 하지
사라지지 않는 언어를 간직했기에
때로는 누구나 마음대로
손 내밀지 못하고 푸른 하늘만 쳐다보며
살아가기도 하지
/ 박일
바람
일년을 농사지은 채소가
大地의 그늘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어두움이 흔들리는 것인지,
대지에서 떨어져 나온 시간들이 흔들리는 것인지,
그늘들은 알지 못하지만
그늘들은 그 시간을 알지 못하지만
바람은 흩어지는 채소의 잎사귀들 곁에서
저 먼 나날들에게 보내지던 말들을 잊지 못한다.
저먼 나날들에게 보내지던 말들을 오늘 또 보내며
오래된 지갑을 묻는다.
지나온 길은 멀었지만
인생은 그걸 알지 못했고,
발걸음 속에 시간들이 묻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바람은,
발걸음 속에 묻힌 시간들이 먼 나날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알지 못한다.
흩어지는 것이 채소 잎사귀의 바람 뿐이랴
떨어지는 것이 어둠 뿐이랴
묻어야 할 것이 오래된 지갑 뿐이겠는가,
이 가을에,
가을날,
보낼 곳이 없었던 그 날의 편지일지도 모른다,
보내지 못한 편지를 버릴 수는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보내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반성인지,
내딛을 갈 곳이 없었던 나날들에 대한 모멸이었는지
보내지 못한 편지는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바람처럼
기억인지, 찢겨진 저 곳에 구렁텅이인지,
부르고 있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呼名인지
가을에 바람은 부는데,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닌데,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떠날 곳이 없기에 머물지 못하는 것인지,
내딛을 발길이 없어서 머물지 못하는 것인지,
떠도는 바람처럼,
떠나지 못하는 바람처럼.
저 비어가는 것들이.
비어가는 것들은 소리를 낸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귀 기울여봐도,
어쩌지는 못하고,
그래서, 어쩌지는 못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 떨어지는 소리없는 꽃잎처럼,
어둠 속에 어둠처럼,
소리가 난다
가만히 들어보면 아무 소리도 없지만,
아무 소리도 없어서, 소리가 난다.
자유와 빈곤만이 있을 뿐이다.
언제 온 지도 알 수 없는데 벌써 저 멀리 가버린 세월처럼, 구렁텅이에 빠진 것처럼,
그늘의 시간처럼,
받아 볼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편지를 부치지도 못한 것,
신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돌아오지 않는 날들처럼
돌아설 수 없는 자취처럼.
바람을 건너는 소리인가 하면
세월이 없다.
바람을 듣는 소리인가
기대었는데, 기대인 건 바람인가.
흩어지는 마음이었나 흩어지는 바람인가
바람에 대고 내 거는 약속같기도 하고
세월에 속은 약속 같기도 하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원초적인 죄인 것처럼,
죄에 묻힌 것처럼
풀뿌리처럼,
귀를 기울인다.
어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귀를 기울인다.
바람에 대고 내 거는 약속같기도 하고
세월 속에 사라지는 날들 같기도 하다.
인생이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
갈대밭에서, 갈대들이 제 가슴을 비벼대는 소리,
혼자 비벼대는 것이 아닌데도
혼자서만 비벼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저 비어가는 것들이.
바람 통로에 대고 듣는 소리같기도 하고,
흩날리는 꽃잎을 통과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저녁 나뭇가지 끝에서,
어른거리는
꿈이라면, 한바탕 봄날의 흐드러진 몸살처럼도 못되고, 그 가정법도 못되는
꿈이라면.
언제 왔는지도 모르는 세월같기도 하다.
벌써 사라진 꿈같은 시간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