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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인천 주안 자동차 2018. 5. 21. 18:41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어느 행려병자의 노래

                                                                                            /김신용




 

그래, 개나 돼지로 태어날 걸 잘못했어

부리가 없어 이 산천 버려져 떠돌다가

목사슬 이끄는 대로 꼬리 흔들며 따라가며

시래개국 선 밥도 황홀히 받아먹고

畜舍에서도 달콤히 잠들 수 있도록

거추장스런 사람의 얼굴 벗을 수만 있다면

하늘 올올이 철조망에 찢겨도 좋으련만

부랑은 왜 날개 만드는 법을 알게 했는지 몰라

바람 타고 비행할 수 있는 꿈을 알게 했는지 몰라

복지원 쇠창살 속이 얼마난 포근한 조롱인가를

거리에서 배고파 방황하던 자는 알지

목 마르면 시궁창 물 할짝이던 나는 알지

강제로 머리 쓰다듬어 주는 노역의 부드러운 손길을

뿌리치고 주인의 다리를 무는 개의 어리석음을

돼지의 어처구니 없는 살의 몸부림을

알지, 철조망 너머 푸른 하늘 나래 파닥이는 순간

천지간엔 몰매의 비가 내리고 검은 밤

숲 속엔 승냥이의 눈빛이 흐르는 것을

맑은 햇살 속엔 인적기 하나 없는 흰산이 솟는 것을

아무리 소리쳐도 메아리 없는 흰산이 솟는 것을

그래, 잘못했어 부끄러운 사람의 얼굴 벗을게

죽으면 마리당 얼마씩 병원으로 팔려가

행복에 겨운 표정의 몰모트가 되고

비명도 즐거운 동물농장의 귀여운 가축이 될게.






      겨울 함바에서 2

                                                                                      /김신용



눈이 내린다.

비록 헐벗은 몸이지만 따뜻이 체온 나누던

판자촌, 헐린 자리

온갖 형태의 돌과 나무가 심어진 정원에

채색된 거대한 아파트의 군락 위에

눈이 내린다.

뜯겨, 그 황량하던 벌판 위의 저 役事

새삼 사람의 무서운 힘을 떠올리듯 내린

눈은 쌓이지만

뿌리 뽑힌 잡초 같은 발자욱 찍으며

바람 불면

뿔뿔이 흩어지던 그 힘의 분산처럼

눈이 내린다

평당 몇 백만 원의 호화맨션이 꽃핀 자리

산에서 뽑혀 온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값도 못 되는

긴 노동의 품삯을 쥐고

지난 날 그 황량하던 벌판만이 제 몫인 떠도는 뿌리들

웅크려 떨고 있는 발자욱 지우며

눈이 내린다.

흩어지면 더 큰 외로움이 저 홀로 얼어붙는 이 저녁

서로의 체온이 더 그리운 겨울밤이 내리고

바람 불면 또 밑둥까지 흔들리는 함바를 찾아드는

추위여

찢어진 판자벽 틈새로 파고든 외풍의 퍼런 서슬에

어둠 한 채 이불 밑, 더욱 웅크리고 누운

잠 속으로

잔뿌리들 서로 엉켜 만리장성 쌓는 모습으로

밤새 사륵사륵 눈이 내린다.

온세상 하얀 눈꽃 한 송이로 피워올리며 꿈결이듯

꿈결이듯 눈이 내린다.






               청계천 詩篇 3


                                                                                           /김신용

 

짐보다 빈 지게 위의 허공이 더 무거운 날

고난처럼 후미진 청계천 뒷길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거기 춘심이네 집

마치 둥지처럼 아늑한 불빛이 고여 있었지

막아선 담벼락엔 지게 서로 몸 포개 기대어 있었고

그 지게를 닮은 사람들, 노가리를 대가리 째 씹으며

술청인 좁은 부엌에 서서 막걸리를 마실 때

춘심이는 부뚜막에 앉아 바느질을 하곤 했었지

잔술을 팔며, 찢겨지고 해진 막벌이꾼들의

작업복을 기워주고 있는 흰 솜털

보송송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연탄불

위의 노가리처럼 검게 타며 오그라들었고

뼈 하나 남김없이 나를 씹어먹고 싶어져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면 시커먼 매연의 하늘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스름 속, 잔광이듯

그 티 없이 맑은 미소의 바늘이 한 올 한 올

허망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터진 자리를

밟아올 때마다 아무리 땀 흘려도 내 몸뚱이

하나도 채 적시지 못하는 나의 땀방울들이

어느새 무거운 짐이 되어 짓눌러와 나를 더욱

남루의 노가리로 여위게 하곤 했지

바깥은 찬바람이 제 가고 싶은 데로 불고 있었고

담 밑의 지게들은 서로 온몸 오그려

추위를 견디고 있었지만 노상 비틀거리는 것은

가난의 앙상한 形骸, 그림자뿐인

귀로, 아무리 갈아도 자꾸만 돋아나는

쥐의 이빨처럼 취기가

하루의 발뒤꿈치를 야금야금 갉고 있을 때

그 가녀린 풀씨 같은 손길이 여며 준 작업복은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풀잎으로 떠올려주곤 했지

그래, 거리 곳곳에 피어오르는 모닥불로

관절염을 앓고 있던 청계천의 그 해 겨울







                   짜장면 한 그릇만 사주실래요?

                                                                                                 /김신용


 

나는 처음, 그 말이 그녀의 울음인지 몰랐다

나는 배가 고파요-. 오늘 밤, 잠잘 곳이 없어요-. 하는, 신음인지도 몰랐다

한 불구의, 공원을 떠돌아다니며 몸을 파는 어린 창녀의, 남자를 유혹하는

눈웃음인 줄만 알았다

걸을 때마다 몸과 심한 불화를 일으키는, 미발육의, 우스꽝스러운 그 몸이

얼마나 값싼 것인가를 나타내는, 기호인 줄만 알았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걸을 때마다 등나무처럼 뒤틀리는, 그 기형의 걸음걸이로

남산 공원을 떠돌며, 만나는 남자들에게마다 <짜장면 한 그릇만 사주실래요?> 하던

그 말이-.

 

나는 갈 곳이 없어요-.

지금 <내 몸이 불타고 있어요-> 하는, 비명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불구,

그 부끄러움을 마비시키기 위해, 신경 안정제를 마약처럼 삼키고

그 몽롱함으로, 공원의 풀숲

공중변소 속에서도 몸을 팔던 그녀

어릴 때부터 그 짜장면 한 그릇을 먹는 것이 꿈이었던

그것이 그때,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던-, 그 몸을 팔기 위해

걸어 들어간 공원의 어두운 풀숲

더러운 냄새나는 공중변소 속에서, 그 우스꽝스런 불구의 몸 때문에

양동 빈민굴 사창가에서마저 몸을 팔 수 없어, 남산 공원의 떠돌이 창녀가 된

그녀가 마지막으로 움켜쥘 수 있었던-,

 

짜장면 한 그릇만 사주실래요?

 

정말 나는 처음 그 말이, 種의 돌연변이인 줄만 알았다

변이 유전인자에 의한, 이상 진화인 줄만 알았다

자신의 불구 때문에, 영혼이 먼저

소아마비에 걸린-.






      공중변소 속에서

                                                                                                              김신용


 

  공중변소 속에서 만났지. 그녀

  구겨버린 휴지조각으로 쪼그려 앉아 떨고 있었어.

  가는 눈발 들릴 듯 말 듯 흐느낌 흩날리는 겨울밤

  무작정 고향 떠나온 소녀는 아니었네.

  통금시간을 지나온 바람은 가슴속 경적소리로 파고들고 

 

  나 또한 고향에서 고향을 잃어버린 미아,

  배고픔의 손에 휴지처럼 구겨져, 역 앞

  그 작은 네모꼴 공간 속에 웅크려 있었지.

  사방 벽으로 차단된 변소 속,

  이 잿빛 풍경이 내 고향

  내 밀폐된 가슴속에 그 눈발 흩날려와, 어지러워

  그 흐느낌 찾아갔네.

  그녀는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 있는 게 분명했어. 난 눈 부릅떴지.

  그리고 등불을 켜듯, 그녀의 몸에

  내 몸을 심었네. 사방 막힌 벽에 기대서서, 추위 때문일까

  살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지만

  솜털 한 오라기 철조망처럼 아팠지만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 밤.

  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마약처럼

  하얀 백색가루로 녹아서 내 핏줄 속으로 사라져간

  그녀,

  독한 시멘트 바람에 중독된 그녀.


  지금도 내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악취 꽃핀 곳

  그녀의 품속밖에 없네.